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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육아휴직 시작 남자로서 육아 휴직. 요새는 점차 늘어나는 추세라지만 아직도 소수긴 하다. 회사에서 흔쾌히..승인을 해주는듯 했으나 알게 모르게 눈칫밥을 먹고 승인도 이런저런 사유로 지연, 금방이라도 승인날 것 처럼 하더니 몇 달이 지나서는, "정말 들어가겠냐"고 재차 의사 확인, 아니 그럼, 육아휴직 들어가는 게 장난이라고 생각하셨어요? 라는 말이 목구멍같이 치밀어 올랐지만, 꾹 참음. 부서장과 인사부의 갖은 회유를 이겨내고 결국 육아휴직 승인을 받아냈다. 나름 대기업이라는 곳이 이렇게 힘들어서야 사회 문화적으로 아직도 아빠의 육아휴직은 험난하구나 생각했다. 애초에 생각했던 1년을 받지 못하고 그보다 짧은 6개월, 이라지만 그래도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난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어린이집 개학은 통상 3월. ..
라캉 관련 번역서 1 라캉 관련 포스팅에 앞서 관련 번역서들을 정리해보았다. 카타오카 이치타케 “라캉은 정신분석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http://aladin.kr/p/UMx9f 브루스 핑크 “라캉과 정신의학” http://aladin.kr/p/QFrtb 라캉은 정신분석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신분석을 창시하고 그 이론을 확립시킨 프로이트를 발판 삼아 정신분석을 재해석하고 현대적으로 부활시킨 라캉의 이론을 중심으로 정신분석을 살펴본 책이다. www.aladin.co.kr 라캉과 정신의학 저자 브루스 핑크는 슬라보예 지젝과 함께 영미권에서 대표적인 라캉 연구자로 손꼽히고 있는 학자로, 이 책은 이제껏 아카데믹한 인문학적 담론 가운데서 주로 논의되던 라캉의 사상을 정신분석 임상이라는 차원에... www.aladin.co..
1592년 8월 8일, 9일,10일 初八日朝雨午晴。上戶長李應壽,兵房李蘭秀自郡來告曰賊已滿郡內矣。是夜送智士涵,大成,禹應緡,胤善,高彦英於倭陣。使之潛伏竊射。則畏㥘而還。 8월 8일 아침엔 비가 왔고 낮에는 맑았다. 상호장 이응수와 병방 이난수가 스스로 찾아와 적이 이미 군내에 가득하다고 보고했다. 밤에 지사함, 지대성, 우응민, 윤선, 고언영을 시켜 왜군의 진지에서 잠복하여 몰래 활을 쏘고 오라 하였으나 겁을 먹고 귀환했다. 初九日晴。朝潮波。伏兵軍執我國付倭者一人來。問之則曰持倭先文者也。卽令斬之。倭將豐臣吉成自穪江原監司。所經之邑。必出先文。山谷愚氓。靡然從之。可痛也。吾謂智士涵等曰君等皆衣君食君。寧顧其身。况今擧家一竇。死生將迫。盍相與一乃心力。僉曰敢不從命。吾曰孤軍據險。非不知大陣之難敵。而敢爲此者。只欲避賊保民而已。毋或恃險而輕敵。但可守我而應彼。愼勿妄動。智士涵曰惟我關東。..
호구록 - 1592년 8월 7일 [壬辰八月] 八月初七日晴。聞嶺東之賊。盡逾大嶺。令整飭器械。巡視形勢畢。謂康女 先生小室 曰吾爲守土之臣。義不可去。故爲此據險之計。窟危矣。汝盍往東村深藏乎。康女曰進賜在此。死生之間。豈可分離。况東村亦不遠於賊路。若有所難則奈何。 先生小子進士公。號春睡堂。及高彦英 中房京人 皆曰據險雖便於守禦。制敵要在乎量勢。方今三京失守。列城風靡。則顧此殘兵。如螗拒轍。徒死無益。東村亦郡地。最爲險阻。且近榮鄕。通問有便。姑往藏兵。或設伏或夜襲。猶可掠捕其零賊矣。事勢若急則姑且轉避兇鋒。以圖後効。何損於義乎。智奉事及諸軍官。皆揚臂大言曰窟險如此。械備又如此。雖有萬賊。何畏之有。城主去此則大事去矣。吾曰吾意亦然。夕先鋒倭。自㫌善入郡。於是呼舟。率康女 及高彦英奴婢四五名入窟。智士涵,品官智大成,禹應緡,智大用,大明,李仁恕,李大忠,忠州避亂人崔嶪,禹胤善及官屬村民幷數百。各率家屬同入。 [임진년..
호구록 - 1592년 3월, 4월 萬曆壬辰三月。除授平昌。四月遭倭變。率郡民。約爲設險郡南十五里許井洞之下。有千仞絶壁。削立如屛。下臨深潭。橫截十里。壁之中央。有上下二窟。下窟可容數百人。上窟可容十餘人。自平地而仰觀。未嘗知有窟在其上。登窟而俯視。前無相對之峯。勢若憑虛。舟通于潭。沿洄一二里而得崖。由崖而東入小谷。十數步而攀石隙。始接足以上。作十餘丈浮梯。乃可攀登。上有臺可坐百餘人。卽外臺也。歷臺而西。轉數十步而崖盡。結巨索。猿引而上。方是窟中。下窟卽避亂諸人所入也。上窟卽衙眷所入也。以郡人前奉事智士涵定代將。抄兵百餘人。結爲心腹。先以防牌設柵於外臺。多置軍器。列懸石車。以備禦敵。自外臺越小谷相望壁上。又有小臺。設器械亦如之。小谷口左右兩崖。相對如門。門內有澗。渴不足憂也。窟中峙糧。飢不足憂也。環一山四面。無人跡可通。而惟石門爲出入焉。賊雖到此。我先藏舟去梯。而左右臺一時發矢放石。則眞所謂一夫當關。萬夫莫開之地也。惠正..
홍길주 - 독서법과 깨달음 4.1 홍길주는 항상 에 대해 말했다. 재주는 부지런함만 못하고 부지런함은 깨달음만 못하다. 깨달음은 도덕의 으뜸가는 부적이다.才不如勤, 勤不如悟, 悟之一字道德之元符也. 1-48 여기서는 번역에 약간 손을 댈 필요가 있다. 도덕(道德)이라고 하는 말은 현대어에 있어 도덕(morality)에 대응하는 번역 술어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홍길주가 도덕이라고 한 말은 와 으로 각각의 개념을 분리해 생각해야 한다. 두 개념은 유학에 있어서나 동양사상 전반에 있어 상당히 중요하고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개념으로 일면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 그러나 위의 문장에서는 와 으로 번역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다시금 번역하면, '깨달음이라는 한 글자는 진리와 실천에 있어 최고의 방편이다'라고 할 수 있겠다. ..
홍길주 - 사서와 육경 속 논어의 위치 3.2 시라카와 시즈카는 에 대한 텍스트 비평적인 관점에서 의 자료를 8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그는 이것을 유가사상의 추이와 관련지어 설명하는데, 1자료는 공자의 망명기간에 고행을 함께한 자로,안회,자공, 염유등의 자료로, 공자사후에 복상하는 기간에 기록을 정리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자공의 자료를 2자료, 공자의 사후 교단이 분열되어 자유,자하,자장의 세유파가 대립하던 시기의 자료를 3자료, 맹자시대까지 이어진 유자와 증자의 대립시기의 자료를 4자료, 공자의 일상생활을 의례화한 편의 자료를 5자료, 직하학파의 손을 거친 듯한 편의 자료를 6자료, 고대의 제왕,일민을 주제로 한 자료와 편등의 자료를 7,8자료로 분류한다. 이러한 분류는 반드시 시대적인 구분을 따르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3.2.1 시라카와..
홍길주 - 논어를 바라보는 관점을 중심으로 3. 1. 에 등장하는 논어의 구절은 상당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은 앞서 언급했다. 그리고 그것은 구절뿐만이 아니라 의 구분으로도 제한적인데 논어 전편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지 않다. 3.1.1 방필에 6목, 연필에 7목, 난필에 8목, 난필 속에 6목으로 가운데 논어는 매우 일정한 비율로 인용이 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의 지표(index)로 생각할 수 있다. 다시말해, 공자가 자신의 제자들을 가르칠 때 를 하나의 이상적인 커리큘럼 과목으로 상정한 것과 동일하게 항해에게 있어 사유의 핵이라 할 수 있는 부분에 가 자리잡고 있다는 가정 말이다. 3.1.2 논어의 구절이 아닌 라는 텍스트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항해의 평이 등장하는 것은 의 71목과 72목이다. 나는 여러 경전 가운데 유독 를 가장 으뜸가는..
홍길주 - 수여삼필 속 논어를 중심으로 1.1 이 논문은 움베르토 에코의에 예시된 논문 작성법에 따라 작성될 연구논문의 초안으로서 기획된 것이다. 1.2 이 논문은에 나타난 항해 홍길주의 논어 해석을 바탕으로 항해 자신이 쓰지 않았던 또는 와 같은 형식의 글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탐구해 갈 것이며, 그러한 가상적인 텍스트 정립의 기초를 마련코자 한다. 1.3 항해는 경전의 주석을 남기지 않았다.따라서 이러한 가상적인 텍스트 창작을 시도하는 것은 작가의 의도에 반하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물리적인 텍스트의 존재유무를 떠나 홍길주라는 인간의 그러한 가상적인 텍스트가 존재했을 것이라는 가정은 타당성이 있다. 그가 비록 체계적인 저술은 하지 않았으나 에 산재하는 논어에 관한 그의 코멘트를 바탕으로 생각해 볼 때, 논어에 관한 깊이있고..
관물편 - 이익의 인생과 등산 길을 가로막은 바위를 어찌해야 하겠소? 내가 산길을 가는데 바위가 길을 막아 다니기가 위험하기에 밀어서 없애려 하자 지나가던 다른 이가 말했다. “아래로 떨어뜨리는 것은 쉽지만 밀어 올리기는 어렵습니다. 지금은 쓸모가 없어서 쉽게 떨어뜨린다지만, 훗날 쓸모가 생겨서 어렵게 밀어 올릴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일단 놔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렇군.” 翁山行有石, 當路危動, 將推以去之. 客曰: “墜下易, 推上難. 今雖無益而爲其易, 後安知不有有益而爲其難乎? 不如且止.” 翁曰: “然” 지금은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내가 어렸을 때에는 사람을 이름 대신 종종 출신지로 부르곤 했다. 안산댁, 부산댁 하는 식으로. 이런 풍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선에서는 더욱 흔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