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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시브인컴 만들기/취미번역들

홍길주 - 사서와 육경 속 논어의 위치

3.2 시라카와 시즈카는 <<논어>>에 대한 텍스트 비평적인 관점에서 <<논어>>의 자료를 8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그는 이것을 유가사상의 추이와 관련지어 설명하는데, 1자료는 공자의 망명기간에 고행을 함께한 자로,안회,자공, 염유등의 자료로, 공자사후에 복상하는 기간에 기록을 정리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자공의 자료를 2자료, 공자의 사후 교단이 분열되어 자유,자하,자장의 세유파가 대립하던 시기의 자료를 3자료, 맹자시대까지 이어진 유자와 증자의 대립시기의 자료를 4자료, 공자의 일상생활을 의례화한 <향당>편의 자료를 5자료, 직하학파의 손을 거친 듯한 <계씨>편의 자료를 6자료, 고대의 제왕,일민을 주제로 한 자료와 <미자>편등의 자료를 7,8자료로 분류한다. 이러한 분류는 반드시 시대적인 구분을 따르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3.2.1 시라카와의 텍스트 비평은 <<논어>>에 대한 유용한 시각을 제공하나, 항해의 <<논어>>는 그러한 엄밀한 의미에서의 텍스트 비평은 시도하고 있지않다.

 

 

 

3.3 지난번 글에서 채드 선생은 조선 후기의 유학에 대해 대체적으로 사서보다 육경을 우위에 두는 경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고 코멘트를 하셨다. 이에 대한 언급은 수여제필 속에서 확인이 되며, 고맙게도 상당히 긴 분량의 논평을 남기고 있다.

 

 

 

3.3.1 <<수여난필속>> 59목에 이르러, 그는 현재의 유학자들의 성향에 대해 비판을 가하며 자신의 논지를 펴는데 그 속에서 우리는 <<항해논어>>의 시대적 배경을 확인할 수 있다.

 

 

 

3.3.2 사실 <<수여난필속>>은 항해 자신의 편집을 거치지 않았다. 이 사실은 <<난필속>>이 일종의 <미발표 원고>에 해당되며, 그의 사상적 검열을 거치지 않은 생각을 검토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물론, 아들 우건의 사상적 검열을 거쳤을 가능성은 있지만, 우건 자신의 말에 따르면, '아버님이 미처 책으로 묶지 못한 글들을 감히 따로 제목을 정하지 못하고 <난필>의 제목에 붙여 <난필속>이라 했으니' 그 편집이 원자료를 훼손했으리라 생각되지는 않는다. <난필속> 전체의 대략적인 느낌을 말하자면 앞의 삼필(방필,연필,난필)보다 한 조목의 글의 분량이 긴 경우가 많으며, <<논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도 가장 많다.

 

 

 

 3.4 <난필속>59목은 경전에 대한 일종의 <총론>적인 글이 등장한다.

 

 

 공자, 증자, 자사, 맹자 이전에는 배우는 사람이 힘쓰는 바는 시서예악 뿐이었다. 공증사맹이 평생 힘쓴 것과 남을 가르친 도구 또한 시서예악 뿐이었다. 공증사맹의 글이 나오고부터 시서와 더불어 나란히 서서 경전이 되었다. 후세에 배우는 자는 함께 높여 차례로 익힐 일이지, 감히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다 하겠다. (강조는 필자)

 

孔曾思孟以前, 學者之所業, 詩書禮樂而已. 孔曾思孟, 平生用功, 及敎人之具, 亦詩書禮樂而已.及夫孔曾思孟之書出, 與詩書, 幷立爲經. 后之學者, 俱尊而迭習之, 毋敢軒輕, 固其宜爾.

 

 

위에 언급한 공증사맹은 각각 <<사서>>의 작자에 해당하는 인물로, 공자-<<논어>>, 증자-<<대학>>, 자사-<<중용>>, 맹자-<<맹자>>에 해당된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해 시서예악-<<육경>>과 공증사맹-<<사서>>의 대립에 대한 항해의 의견을 확인할 수 있다.

 

 

근세에 유림에서 스스로 경전을 궁구한다고 말하는 자가 죽을 때까지 사서만 연찬하면서 왕왕 시서를 익히는 것을 즐기지 않고 심지어는 마음을 다스리거나 몸을 닦는 데 아무 보탬이 없다고 여기기까지 한다. 아아! 어찌 공증사맹이 아무 보탬이 없는 글에 힘을 쏟아 이를 깍고 보태어 애를 써서 남을 가르쳤겠는가? 

 

近世儒林之自謂窮經者, 終其身, 硏鑽四書, 而往往不屑治詩書, 甚或以爲無益於治心修身. 嗚呼! 何孔曾思孟之用力於無益之書, 刪之述之, 矻矻以敎人爲哉?

 

 

항해는 당대의 유학자들이 성인들이 지은 <<사서>>는 공부하면서 성인들이 공부했던<<육경>>은 공부하지 않는 현실을 비판했다. 이는 채드 선생이 말한 조선 후기의 유학자들의 성향과는 조금 다른 평가이다. 항해가 여기서 말하는 <근세>가 당대를 의미하는 것인지 혹은 그 이전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위의 글만 본다면 항해는 조선후기의 <<사서>>에서 <<육경>>으로의 변화에 동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성급한 것이며, 그의 다른 글들을 참고할 때 그는 <<육경>>과 <<사서>>를 함께 높여 차례로 익힐 것을 항상 강조함을 알 수 있다.

 

 

 

 그는 이어서 소위 <<사서>>를 연찬한다는 사람들에 대해서 비판한다.

 

 

 또 이른바 오로지 사서만을 궁구한다는 자도 나는 그것이 도대체 무슨 공부인지를 알지 못하겠다. 이른바 사서를 배우는 것도 그 본령의 바탕되는 뜻이 있는 곳에 나아가 편마다 장마다 되풀이해 거듭 나오는 내용을 궁구하고 익히는 것이 옳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수많은 책 속에서 우연히 한두번 전체 책의 요지와 상관없이 나오는 것을 연구하고 천착하는 것이 옳겠는가?

 

 且其所謂專究乎四書者, 吾又不知其爲何樣工夫也. 所謂學此書者, 就其本令宗旨所在, 篇篇章章, 複出而屢見者, 而究之習之, 可乎? 

 

 

 아마도 당대의 조선 후기의 유학은 이기이원론이니 하는 형이상학적인 담론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항해는 그러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논어>>한 권은 날마다 쓰는 일상적 윤리와 평범하고 절실한 일 아닌 것이 없다. 배우는 사람이 <학이>편과 <향당>편등의 글은 버려두어 구하지 아니하고, 유독 그 귀퉁이에 한두군데 보이는 '일이관지'나 '욕기'같은 대목에 대해서만 천착해 마지 않는다.

 

 論語一書, 無非日用彛倫平易切近之事. 學者捨學而鄕黨等諸篇, 不之求而獨于其偶一二見之一貫浴沂, 而斷斷不已.

 

 

 여기서 우리는 <<논어>>에 대한 그의 분명한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이는 <<논어>>라는 경전 뿐만이 아니라 그의 문장론 전반에도 나타나는 경향이다. 그의 문장은 종종 '신령스러운 생각과 절묘한 구성이 허공에서 솟아난다','생각이 이르러 간 곳이 다른 사람의 의표를 벗어났다'라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그런 '기이한 경계'를 따로 구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는 경계는 기이함을 추구할 수록 더 궁색해지고 글은 평범함을 좇을 수록 더 확장되게 마련이라고 했다. 문장에서도 그는 기기묘묘한 경지를 추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이어서 <<맹자>><<대학>><<중용>>에 대해서도 같은 병통을 지적한다. <<중용>>의 큰 뜻은 버리고 '성'과 미발,이발이라는 두말만 붙잡고 있으며, <<맹자>>가 치인에 있어  세금을 가벼이 하고 먹을 것을 넉넉하게 하는 것에 힘쓴 것은 모르고 '마음'과 '성'에 대한 논의에만 빠져 있으며, <<대학>>의 평이한 진리 : "효도하고 우애하고 아끼고 사랑하여 덕을 귀히 여기고 재물을 천하게 본다"는 요지는 버리고 '명덕'이라는 두글자에 대한 지엽적인 주석만 달고 앉아있으면서, 이를 두고 우리 유학의 가르침이라고 하는데 나는 이것이 무슨 학문인 줄을 모르겠다(而後謂之吾儒之學, 是學也, 吾未知其爲何學也.)고 일침을 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