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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시브인컴 만들기/취미번역들

관물편 - 이익의 인생과 등산

길을 가로막은 바위를 어찌해야 하겠소?

 

내가 산길을 가는데 바위가 길을 막아 다니기가 위험하기에 밀어서 없애려 하자 지나가던 다른 이가 말했다. “아래로 떨어뜨리는 것은 쉽지만 밀어 올리기는 어렵습니다. 지금은 쓸모가 없어서 쉽게 떨어뜨린다지만, 훗날 쓸모가 생겨서 어렵게 밀어 올릴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일단 놔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렇군.”
翁山行有石, 當路危動, 將推以去之. 客曰: “墜下易, 推上難. 今雖無益而爲其易, 後安知不有有益而爲其難乎? 不如且止.” 翁曰: “然”

 

 

지금은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내가 어렸을 때에는 사람을 이름 대신 종종 출신지로 부르곤 했다. 안산댁, 부산댁 하는 식으로. 이런 풍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선에서는 더욱 흔했다. 여러 가지 이름을 갖는 것이 일종의 트렌드였던 조선 사대부들은 이름을 새로 짓는 일이 귀찮아서였는지 아니면 쿨해 보이려고 그런 것인지는 모르지만 종종 자신이 살던 동네의 지명을 가져다가 닉네임으로 삼았는데, 이익(李瀷)도 그랬다.

 

 

 

아직 의견이 완벽히 합치되지 않지만 이익은 대체로 경기도 광주 혹은 안산 언저리에 살면서 대부분의 저술을 남겼는데, 동네에 스타 레이크(Star Lake) 즉, 성호(星湖)라는 이름의 호수가 있어 자신의 별호로 삼았다고 한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의 고증에도 불구하고 현재 광주나 안산 어디에도 성호로 짐작되는 호수가 발견되지 않았으며, 그래서 이름처럼 커다란 호수가 아니라 어쩌면 그냥 조그마한 연못이 아니었을까하고 추측된다.

 

 

 

 이 연못 근처에 살면서 이익은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이 에피소드는 그 중 관물편이라는 이름의 저작에 등장한다. 관물편은 주로 이와 같이 짤막한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어떤 글에는 ”과연 깨우치는 바가 있다”와 같이 교훈성 프레이즈를 덧대기도 하는데, 여기에는 별다른 설명을 달지 않아,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처음 이 글을 접했을 때 나는, 바위는 인재를, 바위를 떨어뜨리고 밀어올리는 행위는 인재를 등용하는 문제에 비유했다고 생각했다. 즉, 쓸모 없어 보이는 인물이라도 ‘때’에 따라 쓰임이 있으니 당장의 효용을 따져서는 안 된다는 용인(用人)의 지혜를 담은 경고로 말이다. 전통적인 해석이기는 한데, 뭐랄까, 썩 개운한 맛은 없다.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이익은 다른 문장들과 달리 말미에 ‘과연 인재의 쓰임이 이와 같구나’라고 한 마디 분명하게 덧붙이지 않았던 걸까. 그렇군(연)이라는 표현에는 쿨하다 못해 싸늘한 느낌마저 있다.

 

 

 

사실, 이익의 집안은 그리 잘나가지는 못했다. 윗대 조상의 행실부터 따지는 조선의 습속을 따라 증조부 대부터 살펴보자면, 증조부 이상의가 인조반정 때 편을 잘못 서 가계가 몰락했고, 덕분에 조부는 이름을 포함해 별다른 행적을 역사에 남기지 못했고, 이익의 아버지 이하진은 1680년 여름, 상대 정당의 정치 공작으로 소속 정당의 임원급 정치인(허적, 윤휴)들이 살해당하면서, 오늘날 북한의 북진로동자구(당시 지명: 평안도 운산) 근처로 유배를 떠난다. 이때 유배길을 함께 했던 이하진의 아내는 이익을 배에 품은 만삭의 몸이었다.

 

 

 

유배지에 도착한 1680년 가을, 이익이 태어나고 이듬해인 1681년 4월 화창한 봄 날, 아버지 이하진은 채 돌이 되지 않은 갓난 아기 이익과 아내를 둔 채 애처롭게도 유배지에서 사망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하진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기록을 남겼다.  

 

 

경신년 가을에 대간(臺諫)이 아뢰어 멀리 귀양 보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분한 마음에 가슴이 답답해하다가 죽었다. 사람 된 품이 거칠고 객기(客氣)가 많았는데,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있어 함부로 자랑하고 잘난 체하였다. 또 일 만들기를 좋아하고 비평하기를 좋아하며 남을 제치고서 윗자리로 올라갔으므로, 그 동배(同輩)들도 자못 그를 싫어하였다.

 

 

 

물론 귀양 보내놓고 좋은 말을 쓰기는 어렵겠지만, 한때 대통령 비서실장(도승지)과 검찰총장(대사헌)까지 지낸 사람에 대한 평 치고는 지나치게 쌀쌀맞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의 서두에서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불행하다’고 했는데, 마치 이익의 집안사를 들여다 보기라도 한 것 같다.

 

 

 

집안 자체가 체질적으로 유약한 유전자를 타고났던 모양인지, 그에게는 이복 형까지 합쳐 모두 다섯 형이 있었는데, 첫째와 둘째는 일찌감치 요절했고, 넷째와 다섯째는 후사가 없는 친척의 양자로 갔으며, 유일하게 아버지 대신 어린 이익을 자식처럼 돌봐주던 셋째 형 이잠은 장희빈의 복권을 주청하다가 역적으로 몰려 곤장을 맞고 사망했다. 이때가 이익의 나이 스물 여섯이었다.

 

 

 

스스로도 어릴 때부터 워낙 허약해서 각종 약 상자를 꿰고 살았으며 어머니마저 ‘너는 책을 읽지 말라’고 권유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주위의 모든 우려와 기대를 무너뜨리고 이익은 그의 집안에서도 드물게, 그리고 당시 조선의 평균 수명으로도 드물게 향년 83세라는 장수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었다. 집안 사람들의 단명을 목도하고 자라온 이익은 건강염려증은 아니더라도 요즘 사람들 만큼이나 건강에 관심이 많았으며, 선비로서의 자기 수양의 일환으로 ‘자기관리’를 철저히 했다. 어쩌면 에피소드의 배경이 되는 등산(山行)도 그런 자기관리 활동의 일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요즘의 북한산 앞자락에 만개한 오리고기 집을 위시하여 등산이 한반도에서 유행하게 된 이유에는 여러가지 가설이 있을 수 있겠으나, 우선 한국의 지형 환경이 가장 크지 않을까 싶다. 한반도 지형은 지금으로부터 멀게는 5억 8천만년에서 가깝게는(도무지 가까워 보이지는 않지만)2억 5천만년전, 흔히 고생대(Paleozoic era)라고 부르는 시기에 형성되었는데, 얼마나 옛날인지 아직 공룡이 생물의 역사에 등장하기도 전이며, 당시의 생물들 가운데 내가 외울 수 있는 이름은 삼엽충 정도 뿐이다. 이런 지층을 해성층(海成層)이라고도 표현하는데 바닷속에 있다가 올라온 땅덩이라는 뜻으로 가끔 산 꼭대기에서 발견되는 조개 껍질이 반드시 최근에 발생한 사건의 흔적은 아니라는 얘기다.

 

 

 

 게다가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더라(仁者樂山)’며 존경해 마지 않는 공자님께서 친히 뽐뿌질까지 해주셨으니 사대부 가득한 조선 땅에 등산이 유행하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이익은 등산 중에 또 다른 등장 인물인 이름없는 ‘객’과 마주치는데, 그 역시 등산객(그리고 아마도 사대부)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노상에서 공개적 토론의 장을 열고 열띤 논쟁을 좋아 하는 우리 한국인들의 심성 또한 살짝 엿볼 수 있는데, 이익이 바위 앞에서 어떻게 밀어 뜨리면 좋을까 하고 고민하는 사이에 그걸 본 다른 등산객이 ‘어허, 그거 밀어버리면 안돼요’하고 훈수를 두고 있는 그림처럼 보인다. 인상적인 부분은 이미 『성호사설』이라는 희대의 베스트 셀러로 조선 후기 지식인 사회에 셀럽으로 자리한 이익이 별다른 권위도 없을 이름없는 다른 등산객의 설명을 듣고 ‘그렇군’ 하고 그 자리에서 타인의 견해를 긍정하는 모습이다.

 

 

 

 대개 자신이 ‘좀 안다’고 할 수록 다른 사람의 논리에 ‘그렇군’하고 간단하게 인정하기가 어려워지는 법인데, 이익에게는 그런 망설임이 보이지 않는다. 참 ‘쿨하다’.

 

 

 

 우리는 머릿 속에 붕어빵 틀을 가지고 있다. 물론 진짜 붕어빵 틀이 아니라 비유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경험은 붕어빵 틀에 찍혀서 붕어빵이 되어 나온다. 어떤 경험이 틀을 변형시키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험은 인생에 꽤 드문 것 같다. 거북이 뒤집듯이 손쉽게 틀을 이런저런 모양으로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러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산길에 만난 바위를 밀어 떨어뜨리기에 급급한 마음으로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