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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시브인컴 만들기/취미번역들

홍길주 - 수여삼필 속 논어를 중심으로

1.1 이 논문은 움베르토 에코의<<논문 잘쓰는 방법>>에 예시된 논문 작성법에 따라 작성될 연구논문의 초안으로서 기획된 것이다.

 

 

 

1.2 이 논문은<<수여삼필>>에 나타난 항해 홍길주의 논어 해석을 바탕으로 항해 자신이 쓰지 않았던 <<항해 논어>>또는 <<항해 선생의 논어 이야기>>와 같은 형식의 글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탐구해 갈 것이며, 그러한 가상적인 텍스트 정립의 기초를 마련코자 한다.

 

 

 

1.3 항해는 경전의 주석을 남기지 않았다.따라서 이러한 가상적인 텍스트 창작을 시도하는 것은 작가의 의도에 반하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물리적인 텍스트의 존재유무를 떠나 홍길주라는 인간의 <머릿속에> 그러한 가상적인 텍스트가 존재했을 것이라는 가정은 타당성이 있다. 그가 비록 체계적인 저술은 하지 않았으나 <<수여삼필>>에 산재하는 논어에 관한 그의 코멘트를 바탕으로 생각해 볼 때, 논어에 관한 깊이있고 체계적인 해석이 전제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1.3.1 항해의 경전 주석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이는 그의 맏형 홍석주에 대한 언급은 본 논문에서는 피하고자 한다. 우선, 그러기에는 필자의 소양이 부족하고 또한 논문에서 다루어야할 문헌의 범위가 지나치게 방대해져 버리기 때문이다. 

 

 

1.3.2 <<수여삼필>> 안에는 논어를 제외한 기타 경전 들에 대한 홍길주의 생각을 다룬 구절도 많으나 이 역시 언급을 제한할 것이다. 이 논문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항해 논어>>라고 하는 가상적인 텍스트의 정립과 그 가능성을 타진하는 데 있지, 홍길주의 <일반 경전에 대한 해석학적 태도의 고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1.3.3 논문에서 참고할 한글 번역본은 <<19세기 조선 지식인의 생각창고>>이며, 원문은 2003년도 한국학술진흥재단에서 발간된 항해의 문집을 저본으로 할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원문의 훈고학적 해석에 매달리지 않고 - 물론, 원문의 해석이 홍길주의 논어 해석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판단될 경우는 그리 할 것이지만 - 그의 생각을 고찰해 나가는 것이다.

 

 

 

1.3.4 기존의 나의 글들과 마찬가지로 이 논문 또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채 <서문 만으로 끝나는 운명>에 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항상 시도라도 하는 것이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 보단 나은 법이다.

 

 

 

2.1 항해 홍길주의 논어에 대한 언급은 <<수여삼필>>안에서 극히 소략하다. 총 485목 가운데 직접적으로 논어를 평하거나 해석한 구절은 18목에 불과하며 간접적으로 언급한 대목도 9목이 전부다. 그러나 이러한 통계적 수치에 근거하여 '항해의 사상에서 논어가 차지하는 부분은 미미하다'라고 결론내리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삼필>>안에서 단일서적으로서 <<논어>>는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2.1.1 <<수여삼필>>은 대부분 자신이 겪은 에피소드나 누군가의 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펼쳐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런 가운데 <<논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18목이나 된다고 하는 사실은 오히려 그를 이해하는 데에 <<논어>>가 핵심적인 열쇠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2.1.2 따라서 우리는 이 글을 통해 항해 홍길주라는 인간의 <핵심>에 다가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방법론으로서 <<항해 논어>>라고 하는 가상 텍스트를 정립할 것이다.

 

 

 

2.2 항해 자신이 직접적으로 언급한 논어의 구절은 매우 적다. 그나마도 한 장 전체나 긴구절이 아닌 하나의 문장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사실은 연구자로 하여금 <자료의 부족>으로 인한 연구의 어려움을 떠올리게끔 할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자료의 부족이야말로 더 중요한 사실로 우리를 인도한다.

 

 

 

2.2.1 항해가 언급한 논어늬 구절이 몇 안된다는 사실은 뒤집어생각하면, 그 구절들이야 말로 그에게 있어 <가장 핵심적인 구절>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수여방필 49목(앞으로는 이러한 표기 대신 1-49와 같은 번호로 대체할 것이다. 번호표기에 대한 해설은 다음장에서 다시 하도록 한다.) 에서 말하듯이 '<<논어>>를 제대로 읽은 사람이란, 전부를 달달 외우는 사람이 아니라, 비록 한 두장도 제대로 외우지 못하여도' 그 뜻을 깊이 새겨 화가나는 일 앞에 '분을 참고, ' 뜻하지 않은 재물을 앞에 두고도 '물리칠 줄 아는' 사람을 말하기 때문이다. 

 

 

 

2.2.2 이러한 항해의 입장은 <<수여삼필>>의 다른 대목에서도 반복적으로 확인된다. <<항해논어>>라는 텍스트의 정당성 내지 정통성은 이러한 자기 반복적인 언사를 통해 재확인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