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망치는 말
밭에 오이를 심었는데 가뭄이 들어 말라 죽으려 했다. 물주는 것을 논의하던 사람이 말했다. “말라 죽으려 하는데 물을 주면 오이가 오히려 해를 입습니다. 차라리 잠깐 숨 좀 돌리고 비 오는 날을 기다림이 낫습니다.” 또 하루가 지나자 잎이 말라붙어 떨어졌다. 그제야 물을 주기 시작했는데 아무리 많이 주어도 나아지질 않았다. 내가 말했다. “심각하구나, 인순의 폐해가!”
種瓜在田, 天旱將枯. 議灌之人曰: “將枯而灌, 瓜反受害, 寧不若姑息而待雨日.” 又一日, 葉瘁而隕. 於是始灌, 雖多無益也. 翁曰: “甚矣, 因循之害事也!”
이익, 『관물편』, 26칙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신화인 길가메쉬 전설에는 ‘수메르 사람들이 오이를 먹는 장면’이 나온다. 한반도에도 삼국시대에 전파가 되어 재배된 것으로 보이는데, 한치윤이 저술한 『해동역사(海東繹史)』를 보면 한반도의 ‘오이(黃瓜)’가 중국에서 유래된 품종임을 알 수 있다.[1]
오이는 추위를 싫어하여 대체로 날이 완전히 풀린 4월 말에서 6월 사이에 씨를 뿌려 7월 중순에서 9월까지 수확하는 것이 보통이다. 즉 여름이 숙성 시기로, 본문에서 가뭄이 들었다 함은 이 시기의 일로 추정된다.
‘말라 죽으려 하는데 물을 주면 오히려 해를 입는다’고 한 말에도 사실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이는 수분을 필요로 하면서도 수분에 취약하여 쉽게 썩어 문드러지기 때문에 수분을 적절히 공급하는 일이 관건이다.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따라서 이익은 화자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를 비판하고 있다.
박종채가 아버지의 일대기를 기록한 책, 『과정록(過庭錄)』은 박지원이 만년에 병이 들었을 때의 일화를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아버지가 병이 들어 몇 날을 누워 계시더니 어느 날 먹을 담뿍 찍어 빈 병풍에다 여덟 글자를 크게 쓰셨다. 인순고식구차미봉(因循姑息苟且彌縫). 그리고 말씀하셨다. "천하만사가 이 여덟 글자 때문에 어그러지고 무너진다."
여덟 글자를 두 글자씩 끊어 읽는다. 인순, 고식, 구차, 미봉. 기존의 해설을 보면 단어들을 거의 비슷한 의미로 풀어 쓰는데, 연암이 동어반복증 환자도 아니고, 나는 연암이 각각에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고 생각한다.
인순은 원래 『장자(莊子)』에 나오는 표현이다. 「소요유(逍遙遊)」라는 장에 사람이 속세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경지를 누리기 위한 방법으로 ‘인순(자연의 이치에 몸을 맡김)’을 주장했는데, 후대에 도가의 사상을 조소하는 유가에 의해 의미가 왜곡되어 ‘그냥 저냥 별 생각 없이 하던 대로 하는 모습’ 혹은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이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모습에 대한 묘사가 아니다. 같은 모습을 도가에서는 ‘아, 저 사람은 참으로 유유자적하여 이치에 어긋남이 없구나’ 하고 감탄하고, 유가에서는 ‘저런 한심한 인간 같으니’하고 손가락질했던 것이다.
여기서는 ‘별다른 비판의식 없이 옛날에 해오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행위’를 말하고 있다. 따라서, 『관물편』 본문의 마지막에 “인순의 폐해가 심각하다!”는 이익의 외침은 화자가 아닌 스스로에 대한 엄중한 경고다.
“이 바보 같은 녀석아, 다른 사람이 그렇다고 하여 그냥 별 생각 없이 그대로 따라 하는 모양이라니, 결국 오이를 말라 죽게 하였구나!”
고식의 용례는, 최초 『예기(禮記)』 「단궁상(檀弓上)」편에 증자의 말로 나오는데, “인격을 도야하고자 하는 이는 오랜 기간에 걸쳐 숙성된 덕성으로 다른 사람을 아끼고, 쪼잔한 사람은 잠시 편안하게 해주려는 마음(姑息)으로 다른 사람을 아낀다”[2]고 했다.
고식은 잠시 숨을 돌린다는 뜻이다. 위의 말은 증자가 말년에 병을 앓고 있던 중에, 자신이 누워 있는 자리가 자신의 신분에 맞지 않아 자리를 옮겨달라고 아들에게 부탁하며 하는 말이다. 아들은 물론 말렸다. 증자의 상태가 위중하여 자리를 옮기다가 사망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증자는 막무가내였고 결국 자리를 옮기다 죽었다.
도가에서 배꼽잡고 웃을 이야기다. 그러나 잠깐의 육체적 편안함 대신 자신이 지향하고 있는 가치를 위해 죽음도 감내한 그 모습을 후세 유학자들은 칭송했던 것이다.
구차의 유래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으나 요즘도 자주 사용하는 말로 사람이나 사물을 마주하는 자세가 당당하지 못하고 구질구질한 태도를 일컫는 말이며, 미봉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등장하는 표현으로, 원래 물샐 틈 없는 전술을 의미하는 말이었으나 후대에 변질되어 임시변통으로 내어놓은 해결책을 의미하게 되었다.
네 가지 개념은 아래와 같이 도식화하여 정리할 수 있다.
구분 |
지향점 |
개념 |
병폐 |
정신적 차원(理) |
비판의식 |
인순(因循) |
구습을 따르는 모습 |
지향하는 가치 |
고식(姑息) |
잠시 편하려는 마음 |
|
현실적 차원(氣) |
도덕적 태도 |
구차(苟且) |
구질구질한 모습 |
실제적 방법론 |
미봉(彌縫) |
임시변통 |
우리는 인생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마주한다. 그것이 설령 오이에게 물을 줄지 말지를 결정하는 사소한 것이라고 해도 매 순간 그런 문제와 맞닥뜨리는 일을 피할 수 없다. 연암과 이익은 그런 문제에 대처하는 삶의 지혜를 말하고 있으며, 사실 모든 유학자들은 늘 그런 삶의 문제에 대해 말했다. 그들이 말하는 ‘이기(理氣) 논쟁’이란 우리가 어떻게 잘 살아갈 것인가 하는 명제에 답하기 위해 우선 검토되어야 할 철학적 주제들이었던 것이다.
이 모든 문제의 시작에는 이익이 지적한 “인순의 폐해”가 있다.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아니 그전에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않는다면, 고식구차미봉을 피할 수 없다. 원래 그랬어, 라는 말보다 세상을 망치는 말은 없다. 원래 그랬다고 하면 더 이상 바꿀 수도 변화할 가능성도 없다. 세상은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의 연속이 될 것이다.
유학자라고 하면, “옛날엔 말이야” 하며 수염을 쓰담 거리며 거드름 피우는 갓 쓴 사람들쯤으로 여길지도 모르지만, 오이를 키우면서도 구습의 폐해를 지적할 만큼 그들은 누구보다 치열한 현실 비판 의식 속에 살아갔다.
혹시 나는 그간 원래 그랬어, 라는 말 뒤에 숨어 인순하고 고식하고 구차하고 미봉하며 살아오지는 않았던가?
[1] 오이[黃瓜] ○ 고려의 오이는 형체가 둥글면서 맛이 있어서, 중국에서 나는 것과 같다.《성경통지(盛京通志)》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사이트, 『해동역사(海東繹史)』 제 26권, 물산지(物産志) 채류(菜類)
[2] pp ~ pp 『禮記』「檀弓上」君子之愛人也以德, 細人之愛人也以姑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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