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점을 취할 뿐이니
내가 감나무를 심었는데, 열매가 많은 쪽은 나무 줄기가 가늘었고, 열매가 드문 쪽은 나무 줄기가 굵직했다. 이후 둘 다 그늘을 너무 짙게 드리워서 하나를 없애려고 했는데, 줄기가 가는 쪽을 없애자니 열매가 많아 아깝고, 열매가 드문 쪽을 없애자니 줄기가 굵직하여 아까웠다. 내가 말했다. “둘 다 남겨 두거라. 부족함이 있다 해도 더 나은 점을 취할 뿐이니.”
翁種柿, 其實多者細, 實稀者大. 旣而同繁翳而將去一, 惡其細, 則惜其多, 惡其稀, 則惜其大. 翁曰: “兩留之. 雖有其短, 取長而已矣.”
이익, 『관물편』 51칙
장점을 발견하는 힘
개인적으로 이후의 삶이 크게 바뀐 계기가 된 사건이 대학 시절 수업에서 있었다. 당시의 나는, 주문한 돈까스의 양이 많으면 소스가 부족함을 걱정했고, 돈까스의 양이 적으면 배가 고플 것을 염려했고, 돈까스를 먹지 않는 날이면 식사가 만족스럽지 않을 것을 우려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지금보다 열 배는 까칠하고 염세적이고 냉소적이었으며 모두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마당에 희희낙락 생각 없이 사는 것 같은 사람들의 머리 속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일본사 수업을 듣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졸업 학점을 다 채우고 시간이 남아 돌아 아는 후배와 같이 들을만한 수업을 찾다 보니 얻어 걸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본어 전공인 내가 사학과 전공 수업을 굳이 찾아 듣게 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수업은 대강당에서 이루어졌는데 초반에 교수의 강의가 몇 주 진행되다가 나중에는 학생 발표와 질의 응답이 매 시간 반복되는 형태였다. 수강생이 많기 때문에 발표자는 일부였고 질의 응답하는 쪽이 몇 배는 많은 상황이었다. 발표도 질문도 대개 사활이 걸린 사학과 전공자들이 독차지했기에, 나처럼 학점에 연연할 필요가 없는 사람은 그저 편안히 앉아서 진기한 서커스 쇼를 보듯이 즐기면 그만이었다. 정말 사자가 불구덩이로 뛰어든다거나 하는 장면은 없었지만 발표자와 질문자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져 나름 볼만했다.
사건은 세 번째인가 네 번째 수업쯤에 일어났다. 발표자의 발표는 훌륭했다. 시니컬한 나도 별로 흠을 잡을 거리가 없어 흥미를 잃을 만큼. 문제는 질문 시간이었다. 맹공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들간의 개인적인 치정관계까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런 문제가 있지는 않을까 의심이 될 만큼 격렬한 비판이 이어졌다. 중간에 교수가 개입하여 질의를 중단시키고, 사학과 전공이 아닌 다른 전공자들도 질문을 하라고 촉구하는 와중에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내가 교수의 눈에 띄어 하는 수 없이 마이크를 잡고 비전공자 대표로 질문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막상 일어났지만 할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나 훌륭한 발표였던 것이다. 발표자의 바지 색깔이나 헤어 스타일을 물고 늘어질까 하다가 나는 훌륭한 발표라고 생각한다고 그냥 솔직히 말했다. 교수가 물었다. 어떤 점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냐고. 마침 정면에는 발표자가 준비한 1900년대 무렵의 도쿄 시내지도가 화면에 띄워져 있었다. 나는 지도가 크고 자세해서 보기 좋았다고 대답했다. 스스로도 멍청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지도가 크고 훌륭합니다 라니. 지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답변에 큭큭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교수의 반응은 달랐다. 그는 박수를 치고 있었다.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발표자는 이 정도 대형화면에도 깨지지 않을 정도로 선명하고 상세한 지도를 준비해서, 당시의 도쿄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생생하게 우리들 머리 속에 그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좋은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나는 선 채로 반쯤 얼이 빠져 있었다. 교수가 말을 이었다.
“요즘 학생들이, 비판을 해야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더군요. 불행한 일입니다. 방금 지도가 보기 좋았다고 답변한 학생은 이번 발표를 통해 좋은 것을 얻어 간 것입니다. 어쩌면 언젠가 지도를 사용할 일이 있을 때 선명하고 상세한 지도를 찾으면 청중들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겠죠. 한 단계 성장한 거죠. 저는 여러분이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비판은 일견 그럴싸해 보일 수 있지만, 지금껏 비판을 해온 질문자들은 이 발표자의 발표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고 어떤 좋은 점도 자기 것으로 가져가지 못한 겁니다. 똑똑해 보일 수는 있겠죠. 하지만 정말로 똑똑해 지는 건 다른 문젭니다. 타인의 장점을 보는 사람은 성장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장점을 먼저 보는 사람이 되세요.”
다른 학생들이 교수의 이야기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또 다른 꼰대의 시시한 훈화 정도로 듣고 넘겼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스물 다섯 살의 나의 마음에는 확실한 족적을 남겼다. 나는 그날 새로운 눈을 얻었다. 부족함이 아닌 더 나은 점을 먼저 보는 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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