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 자네들에게 안 그런 땅이 어디 있겠나?
바닷가(안산, 이익이 살던 곳)에는 뽕나무가 없음을 두고, 사람들이 말하기를, 땅이 척박하고 벌레가 많아 그렇다 하였다. 내가 뽕나무 묘목을 몇 그루 갖다 심었다. 처음엔 잎을 따지 못하게 했고, 조금 자란 뒤에는 잎은 따되 가지를 자르지 못하게 했다. 다 자란 뒤에는 위를 향해 자란 가지는 자르되, 다른 가지는 자르지 않게 했고, 빽빽한 잎은 따되 가지를 흔들지는 못하게 했다. 곧게 선 줄기를 자르면 나무가 높이 자라지 못하고, 가지를 흔들어대면 줄기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나 말을 나무 줄기에 묶어 껍질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했고, 벌레의 알은 긁어내어 아예 씨를 말렸다. 그렇게 10여년이 지나 정원의 뽕나무가 숲을 이루었다. 사람들이 다시 말하기를, 나의 정원이 뽕나무 기르기에 적합해서 그렇다고 하였다. 내가 말했다. “그렇지. 자네들에게 안 그런 땅이 어디 있겠나?”
海堧無桑, 人謂土瘠而虫多. 翁衆植之其種也. 禁採葉, 稍長採而禁伐. 旣長伐其遠揚而勿剪, 取其茂葉而勿拜也. 剪其直幹, 則樹不高, 揉而拜之, 則幹不達. 勿繫牛馬而傷其皮, 剔去虫卵而絶其種. 十有餘年而成林. 人又謂惟吾園宜桑. 翁曰: “何地不然?”
이익, 『관물편』 57칙
이익의 페이스북, 관물편
처음 연재를 시작할 때에만 해도, 내가 이익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이래야 경세치용의 실학자로, 『성호사설』을 남겼으며, 학문적으로 퇴계를 이었다는 정도뿐이었다. 국사 교과서에 나오기는 하지만, 조선의 유학자가 얼마나 많은가. 그들을 하나하나 기억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수업에서 배울 때 그들의 저서나 사상을 다루긴 하지만 인간적인 모습을 알려주는 선생은 없었기에 누구의 이름을 대던지 막연하게만 느껴졌다.
『관물편』은 학술 논문이 아니다. 그들에게 ‘에세이’라는 개념은 없었겠지만, 지금의 한문학 연구자들이 ‘필기’라고 이름한, 어느 장르에도 속하지 않는 성격의 글에 속한다. 그때그때 생각이 떠올랐을 때의 감상 따위를 끄적거리는 형태로, 요즘 사람들이 얼굴책에 그날 있었던 일을 적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행위였다.
관물편이라는 이름 또한 그런 성격을 잘 보여준다. ‘사물을 본다’는 뜻의 ‘관물’은 ‘관물유득(觀物有得)’의 준말로 ‘사물을 보니 얻는 게 있다’, 즉 보고 깨달아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는 소리다. 파리와 벼룩, 누에와 뽕나무, 광견병에 걸린 개와 같이 제재의 제약이 거의 없는 점도 이런 자유로움에 근거한다. 자신의 성격이 가감 없이 표출된 가장 솔직한 글이라 할 수도 있겠다.
자네에게 안 그런 일이 어디 있겠나?
이익이 살던 안산은 바다를 연해 있어 토양이 비옥하지 않다. 이는 요즘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염분이 많기에 어떤 작물을 심어도 좀처럼 풍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여 대부분의 인구가 농사도 짓고 물고기 조업도 하는 반농반어민(半農半漁民)들이다. 그들이 조선의 국가기간산업이었던 양잠을 하지 못해 토양 탓을 하는 게 당시로서 그리 비상식적인 언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익은 어렵다고 손을 놓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려 십 년에 걸쳐 부정할 수 없는 반대 증거를 만들어 내놓았다. 그가 묘사했듯이 지극히 꼼꼼한 관리를 통해 뽕나무 숲을 만들어냈다. 사람들이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헌데 재미나게도, 사람들은 이익의 정성이나 노고 때문이 아니라 이익이 뽕나무를 심은 그 정원이 안산에서는 드물게도 뽕나무 심기에 괜찮은 땅이었다고 말을 바꾸었다. 잘 되도 땅 때문, 안 되어도 땅 때문.
이익의 대꾸가 시니컬하다. “그렇지. 자네들에게 안 그런 땅이 어디 있겠나?” 십 년에 걸쳐 이룩된 뽕나무 숲을 보고 자신의 게으름을 반성하기는커녕 여전히 바꾸지 못하는 우매함을 힐난한 것이다.
요즘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할 때는 이런저런 탓을 하며 일이 되지 않음을 성토만 하다, 다른 사람이 그 일을 해내면, “걔가 잘해서 그런 게 아냐, 그 일이 원래 될 거였어” 하고 말하는 자들.
이익이 보았다면 이렇게 말했을 법하다. “그렇지. 자네에게 안 그런 일이 어디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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