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 이론은 흔히 말도 안되는 낭설로 치부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평행이론에 흥미를 보이는 이유는 거기에 진실로 들어가는 약간의 경험적 관찰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몇 십년전, 혹은 몇 백년 전 죽은 사람과 똑같은 삶의 루트를 밟는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될까. 링컨과 케네디가 둘 다 암살되었다고 해서 다른 삶의 궤적마저 유사할까? 그러나 이런 질문은 어떨까.
우리의 삶이 구조적으로 패턴화되어 있다면?
즉 우리가 무한한 선택지를 무한한 조합으로 이끌어 가는 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한정된 선택지와 루트를 따라가는 것과 같다면, 마치 평행 이론인것처럼 보이는 경우의 수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우선, 극단적인 평행이론적 사례를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일벌의 삶이다. 일벌들의 삶은 완벽하게 평행이론이 성립하는 세계다. 그들은 유전적으로 구조화된 행동 패턴의 지배하에 있으며, 벌 커뮤니티의 하이어라키 내에서도 완벽하게 행동의 제약에 놓여있다. 일벌로 태어나 여왕벌이 된다던가 하는 일은 없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소위 자유 의지(free will)가 존재함에도 마치 "운명"처럼 어떤 알 수 없는 패턴에 지배를 받는다는 가정이 성립할까?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뇌(brain)다. 뇌는 기본적으로 패턴을 인식하는 장치다. 그러나 아무 의미없는 패턴을 무한대로 인식하지 않는다. 뇌가 인식하는 패턴은 생존에 도움이 되는 패턴들이다. 이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충분히 서포트가 되는 과학적 사실이다. 예를 들어, 뇌의 포식자 디텍팅 시스템은 가늘고 길고 재빠르게 움직이는, 즉 뱀과 같은 물체를 경계하도록 무의식을 조직해놓았다. 우리의 의사나 의식적 결저오가 달리 비슷한 것을 보면 몸이 얼어붙는 반응을 보인다.
언어와의 공진화(co-evolution) 과정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그것은 대체로 드라마타이즈되는 경향이 있다. 신화, 동화, 민담, 전설, 가쉽 모든 이야기들은 우리의 행동 패턴이 어떻게 구조화 되는지에 대한 관찰 보고서다.
몰락한 영웅, 민족의 배신자 , 사악한 지주와 같이 전형적인 인물상은 현실을 과장한 것처럼 보이지만, 행동 패턴의 특징을 추상화한 결과다.
정관격이라고 하는 사주가 있다면, 이 사주와 비슷한 사주의 소유자의 운명의 테마는 정관이 된다. 따라서 이들 사이에 평행이론이 성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기록들이 나타난다고 해도 역술가는 조금도 놀라지 않는다. 육십갑자의 조합으로 인간의 운명을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와 같은 전제에서 가능한 것이다.
문학(앞서의 모든 이야기 장르를 통칭하는 광의의 개념의 문학)의 인물들은 추상화되어서 현실성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햄릿처럼 걱정 근심에 고민을 거듭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하나의 단일화된 인격체가 아닌 다양한 서브 퍼스낼리티의 결합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자신 안에 햄릿이 있다. 칭기스칸을 품은 사람도 있고, 간디를 품은 사람도 있다. 우리는 하나의 인격이 아니라, 다양한 인격의 각축 속에 자신을 구성한다.
링컨과 케네디의 삶이 놀라우리만치 유사하다면 그것은 두 사람이 처한 시대 상황의 공통점(남북전쟁, 베트남 전쟁과 같이 서로 다른 이념의 충돌이 격렬한 물리적 형태로 드러나는 사회적 맥락)과 두 사람의 개인적 캐릭터의 유사성(권위에 순응하는 대신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고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는 점) 등이 상호 작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즉 두 가지 측면, 역사적 맥락 + 개인적 특성 의 결합이 평행이론 현상을 만들어 낸다.
개인의 성격적 특성인 big5 이론은 특정한 성격 유형을 조합하는 방식으로 개인의 퍼스낼리티를 설명하는 것을 거부하지만, 우리는 충분히 경험적으로 이를 추정해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사차원이라고 하면 자유분방하고, 기존의 개념이나 권위에 얽메이지 않으면서(높은 개방성High Openness) 동시에 사교성이 떨어지는 (Low Sociableness) 등의 특성을 짚어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페르소나를 지닌 사람의 그림자(shoadow)적인 측면, 자신보다 낮은 연령 등에 권위적이면서도 사교성이 높은 특성을 보이는 즉 꼰대적인 기질이 잠재해 있으며 이런 특성이 돌발적으로 그의 삶에 나타나 그를 괴롭힐 거라는 사실 또한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미드 프렌즈에서도 챈들러가 윗집에 사는 독거노인의 죽음을 목격하고 마치 "평행이론"같은 그의 삶을 보고 두려워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들의 성격적 특성이 상당히 일치하고 아마도 가정환경이나 사회적 맥락까지 유사해서 충분히 그와 같은 삶의 결과를 맞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챈들러의 걱정이 과대망상은 아니었다.
실재의 사회적 구성이라는 개념처럼 우리를 둘러싼 실재는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우리는 아이스크림의 새로운 맛을 만들어낸다기보다는 기존의 베스킨라빈스 맛 중에 몇가지를 선택해서 주문하는 소비자의 입장이다. 개중에는 특이한 취향의 맛도 있고 특이한 조합도 있지만, 통계적으로 보면 사람들이 선호하는 맛의 조합은 상당히 "패턴화"되어 있다.
피에르바야르는 '나를 고백한다'는 책에서, 자신이 자시느이 아버지가 살았던 과거의 혼란기에 태어났더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를 치밀하게 추체험하는 방식의 글쓰기를 시도한 바 있다. 이것이 더 나아가면, 고대 인도의 "윤회"와 같은 개념으로 가는 것이다. 즉 우리의 업(습관의 축적, 행동 패턴)이 우리를 이번 생, 다음 생에도 계속 지배한다는 믿음이다. 그리고 이는 문자 그대로가 아닌 추상적으로 진실이다.
즉 우리는 언어(그 배면에는 언어와 함께 발달되어온 관념, 사상, 문화가 존재한다)가 우리에게 부여하는 운명을 살아간다.
동양에서는 안 좋은 운때를 피하는 법을 1명 2운 3풍수 4독서라고 한다. 1,2,3 은 비보적 관점에서 나온 것이지만, 4 독서라는 말은 개인의 행동 패턴이 변화하는 수단으로 언어의 재구조화를 지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고의 흐름은 모든 언어가 무한대의 방식으로 재구조화 될 수 있다는 식의 포스트 모더니즘 적인 경향으로 호도될 가능성이 있으나, 그런 것은 아니다.
칼 융이 선구적으로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는 집단 무의식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다. 이들은 라캉의 지적과 달리 이미지로 다가오는데, 그것은 수백만년에 걸치 유인원의 경험, 즉 행동 패턴이 누적되어 프로그래밍된 것이다. 즉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고대의 지혜 혹은 우리 자신에게 내장된 지혜를 새로운 언어로 발굴하는 일 뿐이다.
요약하면,
1. 삶은 패턴이다
2. 패턴은 진화적으로 우리 뇌에 빌트인되어있다
3. 융은 이를 집단 무의식으로 개념화했다
4. 집단무의식의 기록은 넓은 의미의 문학에 남아있다.
5. 우리의 삶의 패턴은 이 문학에 이미 다 기록되어 있다.
6. 이 문학의 의미를 더 깊게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운명을 더 높은 곳에서 조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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