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언 리더의 "광기"는 라캉주의 정신분석학자가 지금은 임상에서 거의 사라진 "조용한 광기"의 정체에 대해 고찰한다. 현대인의 정신병에 대한 고착된 이미지는 과장된 행동, 한 눈 에도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말투, 튀는 몰골 같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라캉과 그 선구자들이 발견, 관찰하여 기록으로 남기고 리더가 예증을 들어가며 논증하고 있는 사례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그러나 명백한 광기를 띈 정신병에 대한 이야기다.
라캉의 이론 혹은 가설은 현대의 정시느이학계에서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특히 그가 주창한 거울단계(아이가 특정 나이가 되면 거울을 통해 발견한 자신의 이미지를 통해 운동 기능을 획득한다고 하는 가설)에 대해서는 실험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오히려 그의 이론은 주로 인문학자나 철학자들이 전용하여 문화 이론 쪽에 적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슬라보예 지젝 같은 이가 라캉주의를 대표하는 유명한 철학자다.
대리언 리더의 경우, 그의 저작이 상당히 많이 국내에 들어와 있음에도 인지도는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그의 글이 결코 친절하지 않은 탓도 있으나, 그가 전개하고 있는 사유의 개념과 구조 자체가 우리에게 낯선 탓이 더 크다. 예를 들면, 위에 기술한 "조용한 광기"와 같은 개념 말이다.
조용한 광기란, 겉보기에는 멀쩡하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끔찍한 짓을 저지르는 것과 같은 사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사회 생활에 훌륭하게 적응하며, 언어 구사, 논리적 완벽성, 직업적 의무를 수행하는 데 조금도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리더는 이들을 광기의 소유자로 분류할 수 있으며, 그 트리거가 될 사건이나 상황이 어떻게 촉발되며 그들의 정신이 무너져 내렸는가를 추적한다.
리더는 여기서 광기와 망상을 구별하는데, 우리가 흔히 정신병의 원인이라고 여기는 망상이 결과일 수 있음을 지적한다. 즉, 정신의 광기로부터 정신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면역 작용으로서 정신이 망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자신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이것이 자신에게 자신이 모르는 쌍둥이가 있으며 이 쌍둥이가 비난받을만한 짓을 하고 다녀서 그렇다는 망상을 만들어 낸다. 여기서 환청이 들리기 시작한 사건 자체는 광기 때문이지만, 그에 대한 반응은 그렇지 않다. 즉 이는 지극히 정상적인 정신의 작용이다. 무언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을 때 이를 설명해내는 정신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이 망상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한, 그의 정신은 광기에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무너뜨리는 어떤 종류의 사건이 그의 인생에서 발생하면, 망상은 더 이상 광기를 막아내는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다.
이는 라캉주의가 말하는 현실(리얼리티)이 물리학자가 말하는 현실과는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라캉주의의 현실은, 몸(실재계), 언어(상징계), 이미지(상상계)의 상호 작용으로 지탱되는 현실이다. 정신병 혹은 광기의 발현은 이 구조에 문제가 있을 때 발생한다. 즉, 정신병은 구조적으로 이미 피할 수 없는 사건이다. 정신병은 "안정 시킬 순 있지만" 정신병적 구조 자체를 정상인의 정신 구조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를 놓친 정신분석학자들에 의해, 안정화된 정신병적 구조를 지닌 환자들의 정신병이 발발하는 사례도 있다고 리더는 경고한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관찰로,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일반인에게도 더 이상 설명이 불가능한, 어떤 지점들이 존재한다. 이것이 정신병적 구조의 망상과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이지만, 어떤 종류의 강력한 믿음은 논리적 공격을 거부한다. 그것들은 집단 무의식의 소산이자 우리를 개인이게 하는 성향의 발전이다. 정신병자와의 차이는 일반인의 경우, 이 믿음이 무너지는 사태가 일어나도 정신 자체가 붕괴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진보, 보수의 갈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인간의 내재된 성향은 상당히 강력해서 대체로 그 성향에 따라 개인의 개성이 발달하게 되며, 그 아래에는 상당히 바꾸기 어려운 여러 믿음들이 깔려 있다. 이 믿음은 조너선 하이츠가 예증한 바와 같이,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는 시스템의 산물이다. 조너선 하이츠는 진보주의자였다가 보수주의의 미덕 또한 공감하게 되었다 고 고백하지만, 내 생각에 그가 그렇게 변화할 수 있는 것 또한 어느 정도 그의 성향과 개성의 영향이라고 보아진다.
하나의 퍼스낼리티로 모든 것을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예를 들어 개방성(openness)이 높은 사람의 경우, 다른 종류의 생각이나 상상을 맏아들이는 데에 더 뛰어나다. 반대로 이 성격적 특징이 낮은 사람의 경우, 굉장히 고집이 세고 본인의 생각을 고수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 사례에서도 진보에서 보수로 전향하는 사람이 보수에서 진보로 전향하는 사람보다 수적인 면에서 많다.
라캉이 말하는 몸-실재계는 인간의 근본적인 생물학적 시스템 전반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신경시스템, 호르몬 체계와 같은 것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것은 우리가 환경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물질적이자 진화론적 토대다. 몸은 상당히 많은 것을 빌트인화했다. 환경과 더불어 생존할 수 있도록 최적의 세팅을 해놓았다. 그러나 이 부분에 근본적인 결함 처럼 보이는 문제가 종종 발견된다. 특정한 성적 취향은 후천적인 환경과 낮은 상관관계를 가지며, 거의 백퍼센트 유전적인 요인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이기도 한다.
이미지는 우뇌적인 세계다. 꿈에 속하기도 하고, 우리가 미처 언어화 하지 못하는 많은 지식과 지혜들이 여기 속한다. 이미지들은 우리에게 말을 거는데, 이를 언어화하면 좌뇌로 넘어온다. 예를 들어, 단군 신화는 쑥과 마늘을 먹으며 백일을 동굴(악조건) 속에서 인내한 곰이 인간으로 변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현대 심리학에서 말하는 만족지연을 이야기화 한 것이다. 만족 지연은 기묘한 인간의 습성 중 하나로, 미래에, 즉 아직 발생하지 않은 가능성을 위해 현재의 욕구 충족을 포기하거나 연기하는 행위를 말한다. 인류는 이런 행동의 이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으며(어느 시점에선가) 이를 이야기와 이미지라는 형태로 끊임없이 서로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라캉은 정신병의 발발을 상징화의 실패로 본다. 즉 언어화가 되지 않은 몸과 이미지의 침투로 해석한다. 이는 정신적으로 불안한 사람들이 꿈에 시달리는 사례를 통해 간접적으로 증명된다.우리는 종종 꿈을 배반하는데, 이때 상상계와 상징계의 괴리가 심해진다. 꿈에는 정해진 해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인류의 일부로서 비슷한 테마를 변주하는 지휘자와도 같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살며 우리만의 신화를 만들지만 그것은 동시에 인간이라는 종의 운명이고 신화인 셈이다.
여기서 '의미'라는 화두가 등장한다. 의미는 명확한 듯 보이지만 실체가 없다. 그러나 이 의미라는 것은 먼저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검토될 필요가 있는 개념이다. 생과 사라는 문제는 유전자 레벨에서 개체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사는 것은 =좋은 것이고 죽는 것은 =나쁜 것이다.
유교문명권에서는 수(장수)하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는데, 어떤 사건이나 상황에 대한 가치 평가는 그것이 지속가능한 것이냐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지속 가능한 것이 생존의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이다.
의미는 진화의 결과를 축적한 몸의 시스템과 언어, 이미지의 원만한 결합을 전제로 한다. 언어학적으로 기표와 기의의 결합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이 결합은 하이어라키를 토대로 성립한다. 아주 기본적이고 단순한 형태의 하이어라키다.
엄마-아빠-나-의미의 콰테르니오(사위일체)다. 엄마와 아빠는 음양의 대립적인 가치를 상징한다. 그리고 그것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나'라는 주체의 자리가 있다. 그리고 이 삼위일체에 의해 마지막 '의미'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 구조가 안정되면 인간의 몸이 의도한 형태의 소위 정상적인 정신이 성립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구조에 필요한 요소의 누락 등에 의해 공백이 발생한다. 이것이 정신병적 구조다.
현재 한국사회는 개도국에서 선진국 대열로 약 40여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경제적 성장을 이룬 역효과로, 가치의 상실, 혹은 의미의 위기에 놓여 있다. 이는 국민소득이 몇백불에 불과하던 나라 가운데 몇 만불까지 올라간 사회에 보이는 공통적인 현상이다. 세대간 불통이란 오래된 테마 이지만, 그 정도가 극심하다. 팩트풀니스 같은 책을 보면 소득 수준에 따라 이 단계를 4단계로 구분해 놓았는데, 이를 테면 현재 극빈국이 1단계고, 대한민국은 4단계에 속한다. 그러나 우리가 종종 자랑스레 언급하듯 대한민국은 원조 받던 나라(1단계)에서 원조하는 나라(4단계)가 되었다.
음에 해당하는 전통 사회의 가치와 양에 해당하는 현대 사회의 가치의 대립 속에 이를 인식하는 주체는 의미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혼란 스러워하고 있다. 이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음과 양은 상호보완적이다. 예를 들어 집단주의적인 전통 문화와 개인주의적인 현대 문화는 서로 대립하는 듯 보이지만, 개인은 집단에, 집단은 개인을 위해 기능한다.
유럽이나 미국 같은 국가들이 개인주의의 기반 아래 연대, 공감과 같은 문제들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던 것이 지난 20세기의 현상이었다. 불교의 유행, 히피 문화 등을 지나 현재도 이 과정은 진행중이다. 전체주의의 발화는 개인주의의 그림자가 쌓아온 일종의 반동으로 보여진다. 역사의 비극은 균형추처럼 이를 바로잡으려는 움직임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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