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에 딱지가 앉도록 자주 듣는 말이 있는지? 나는 있다.
“힘 빼. 힘 빼라. 그렇게 힘만 쓰니 되니?”
도장에서 스파링 중인 우리들을 보며 맨날 관장님이 하시는 말씀이다.
처음 수영을 배울 때도 듣던 말이다. “회원님은 근육이 딱딱하고 짧은 시간에 큰 힘을 내는 형태로 발달되어 있어요. 그래서 힘을 빼셔야 해요.” 첫 날 수영강사가 내 팔을 잡고 자세 교정을 해주며 말했다. 나는 물에 대한 공포가 심했는데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물에 들어가면 몸에 힘이 들어갔었던 모양이다. 빠지지 않으려고. 물론 그렇게 하면 더 잘 가라앉는 건 안 비밀.
스파링을 하면 무섭다. 서브미션(마무리 기술)에 걸려 목이 졸리거나 팔이 꺽이는 일도 무섭고 니온밸리(상대의 배를 무릎으로 압박하는 기술)에 깔려 몸부림치는 일도 괴롭다. 그러다보니 안깔리려고 발버둥치고 안 잡히려고 도망치게 되는데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간다. 그런데 힘을 빼라고요?
“깔려줘. 많이 깔려야 돼. 그래야 늘어.”
관장님의 솔루션. 깔려 본다. 힘들다. 또 깔려 본다. 역시나 힘들다. 언제쯤 느는 건가.
옛날 사람들은 책을 읽을 때 암송을 했다고 한다. 그걸 ‘소독’이라고 한다나? 요즘엔 엄두도 못 낼 일이지만, 굳이 외우지 않아도 머리에 남고 기억에 남는 말은 있는 것 같다. 살아가면서 많은 말을 접하고 또 내뱉고 하지만, 지나고 보면 남는 건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
예전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상실의 시대”라고 번역한 문학사상사 버전의 책이 있었는데, 딱 그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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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하지마. 인정해.”
기술이 제대로 안 먹히면 깨끗이 패배를 인정하라는, 관장님의 말씀. 진 건 진 거다. 상대방의 기술이 나보다 나아서 내 가드(방어)가 뚫렸으면 무식하게 힘 써서 막거나 이기려고 하지 말고 인정하고 밑에 깔려라.
말은 쉽지만 이게 참 어렵다. 나보다 그랄이 많은 사람에게 깔리는 거야 그렇다쳐도 그랄이 적은 사람이나 신입에게 깔리는 건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다. 왠지 자괴감이 들고 심하면 운동이 하기 싫어지기도 한다. 중학생이 초등학생 한테 삥뜯기는 기분이랄까 (뜯긴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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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운동을 하면서 정신 수양까지 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운동이란 게 원래 이런 건가. 뭔가 잘못된 건가. 번민을 거듭하면서도 도장에 나간다. 그거 외에는 달리 계속할 방법이 없다. 매트에 몸을 던져 상대와 치고 받지 않고는 (실제로는, 관절을 꺾고 목을 조르지 않고는) 답을 알 수가 없다. 관장님처럼 주구장창 옆에서 말해준다고 알아듣는 것도 아니다.
조금씩이나마 오랫동안 이것저것 운동을 해 본 결과, 알게 된 사실 하나. 세상에는 내가 몸으로 부딪힌 경험으로만 알 수 있는 일들이 있다. 그런 건 글로 쓰거나 영상을 찍어 보여준다고 해도 전해 줄 수가 없다. 두발 자전거를 타는 일과 같다. 자전거가 넘어지지 않게 중심을 잡는 요령을 아무리 말로 설명을 듣느니, 직접 자전거를 몰고 한강으로 나가 넘어지면서라도 앞으로 나아가 보는 게 ‘자전거를 타는 데 직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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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짓수를 다른 말로 ‘증명의 무술’이라고도 한다. 중국 무술처럼 단지 오래 수행했다고 대접을 받는 게 아니라, 무조건 실제 대련(스파링)을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기술의 우월함을 ‘증명’한다. 관장님과 스파링을 해보면 이 사람이 가진 기술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거대한 절벽이 앞에 있는 듯하다. 블랙벨트가 가진 권위를 느낀다. 그래서 머리로는 이해가 잘 안됨에도, 따라간다. 그러다 보면 어딘가 도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희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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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고보니, 관장님이 늘상 하는 말이 하나 더 있다.
“괜찮아. 어차피 나중에 다 만나. 조급할 필요 없어. 좀 빨리 가나, 늦게 가나 그 차이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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