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문학에는 유통기한이 있다.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대략 17세 - 37세 구간 정도인듯하다. 사춘기를 그의 소설의 주인공이 되어 보냈다. 사회인으로서의 사춘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를 따라 클래식과 재즈를 들어보고(안 맞아서 포기), 달리기를 시작했다(비교적 잘 맞아서 4,5년 했고 나중엔 풀코스 마라톤도 뛰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흉내내는 것은 흉내의 필요가 다할 때까지만 기능하는 것 같다. 그 시기의 나는 정체성의 혼란기였고 그 혼란스러운 마음 상태를 하루키와 하루키의 소설 속 주인공(종종 이 둘이 구별 가능한 건가 싶은 생각이 든다)에 기대어 통과해왔다.
연약했던 페르소나를 대체할 무언가를 그들에게서 찾았던 듯하다. 대체로 아시아권 사회가 소시오센트릭(sciocentric)한 문화와 도덕, 가치체계를 고수해 온 탓에, 20세기에 일어난 사회적 변화 속에 혼란스럽던 개인(나 자신)이 철저하게 개인적인 그러면서도 아시아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의 삶의 방식을 일종의 롤모델로서 받아들였던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래서 이런 갈등이 현재진행중인 사회, 사람에게는 하루키의 문장이 큰 힘이 되는 듯 하다.
그의 백신 덕분에 나는 무사히 그 시기를 건너왔고, 내가 지나왔던 시간의 의미를 조금씩 이해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하루키가 변했다, 고 한다. 스타일 상으로 보면 1인칭에서 3인칭, 디태치먼트에서 커미트먼트로 개인과 사회에 대한 태도가 변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결국 삶에 대한 태도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는 별로 변한 것이 없다는 게 개인적인 의견이다. 그는 여전히 지극히 개인적인 삶을 살며 다른 무엇보다 개인의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미국적인 가치라기 보다는 (분명 그렇게 보여지긴 하지만)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라고 생각한다.
그를 따라 달리기를 하고 마라톤을 뛰고 수영까지 하다가 주짓수에서 그 행로가 갈라진 것이 나는 그와 나의 인간성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과 접촉하지 않는 선에서 그러면서도 완벽한 운둔자로 사는 대신 자신만의 거리를 지키며 다른 사람과 사회와 소통하는 삶의 방식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그가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는 '시스템'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자유를 최대한 확보하면서 사회 시스템과 맞물려 돌아갈 수 있는 "개인적 시스템"을 구축해 냈다.
모방은 끝났다. 더 이상 그의 문장을 읽어도 예전처럼 가슴이 뛰지 않는다. 여전히 잘 쓴 문장이라는 건 알지만, 개인적인 불꽃은 이제 그곳에 없다. 나는 새로운 자리에 서 있다. 그리고 그곳은 하루키가 가보지 않은 길이다. 그 길은 나라는 인간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그 길을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