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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물편 - 인생의 파리와 벼룩

피콕20 2020. 3. 27. 16:08

파리와 벼룩

 

 

내가 낮에 방에 앉아 있는데 파리 떼가 탁자 사이로 어지러이 모여들었다. 쫓아도 없앨 수가 없기에 파리를 쫓아다니며 파리채를 휘두르게 시켰더니 파리채를 맞은 것들은 반드시 죽었고 죽지 않은 것들은 멀리 도망쳤다. 내가 말했다. “쫓아내는 것도 방법이 있구나.” 누군가 말했다. “대낮의 파리는 쫓아버릴 수 있지만 밤중에 벼룩이 모여들면 해로움이 매우 심각하니 어찌해야겠습니까?” 내가 말했다. “나도 저것들은 어찌할 수가 없다네.” 

 

  翁晝坐于室, 群蠅亂集几案間. 驅亦不能去, 命爲拂子隨而揮之, 撞着必死, 其不死者遠避. 翁曰: “駒之有術矣.” 或曰: “蠅在白日, 可以駒之, 蚤集于夜中, 爲毒偏甚奈何?” 翁曰: “吾無奈彼何耳.” 

 

이익, 『관물편』, 31번째

 

 

청승 맞다 혹은 청승 떤다는 말이 있다. 어원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혹자는 청상과부(靑孀寡婦)의 청상이 동사화 된 표현이라고 한다. 일리가 있다. 그런데 옛날 노래 가사집인 『시경』이라는 책에 ‘쉬파리(청승, 靑蠅)’라는 노래가 있다. 

 

 

윙윙대는 쉬파리가 營營靑蠅

울타리에 앉았네 止于樊

점잖은 군왕께서는 豈弟君子

참소하는 말을 믿지 마소서!  無信讒言

 

 

 

여기서 쉬파리는 ‘소인배(小人)’에 비유되었다. 영영이라는 말은 그런 소인배들이 아첨하는 모양을 쉬파리 소리에 풍자적으로 빗댄 것으로 요즘도 다른 사람의 말 소리를 시끄럽다며 비난할 때, 어디서 ‘똥파리가 윙윙대냐’고 말하는 것과 거의 유사한 표현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청승의 어원이 이쪽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인격이 훌륭하지 못한 정치인’의 의미로 사용되던 말이 민간에 전파되면서 일반화 되어 ‘궁상맞은 사람, 그런 행동’으로 그 의미가 확장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비슷한 사례로 ‘양반’이라는 말의 용례 변화가 있다). 믿거나 말거나.

 

 

 

이익의 글쓰기 소재에는 금기가 없다. 사소하다든가 하잘 것 없는 일이라든가 하는 식의 선입견이 없다. 가끔 글쓰기 강좌와 같은 책을 보면 ‘소재를 잘 골라라’라는 식의 조언이 엿보이는데, 이익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글이 소재가 된다.  
 

 

 

이번엔 파리와 벼룩이다. 

 

 

 

책상 주변으로 자꾸 파리가 꼬이자, 쫓아내려고 하지만 한번 쫓아내면 저쪽에 다시 모이고 하는 식으로 좀처럼 완벽히 쫓아낼 수 없었다. 그래서 파리채를 만들어 파리를 쫓아다니며 죽이자 파리가 모두 흩어졌다. ‘그래, 드디어 파리를 쫓는 법을 알아냈다’며 좋아한다. 누군가 훅 들어온다. 잠잘 때 괴롭히는 벼룩은 어떻게 쫓아야 하나요? ‘뭘 어떡해. 방법이 없지.’ 

 

 

 

뭔가 맥이 빠지는 것 같다. 아니 대학자라는 사람이 이런 별 의미도 없는 글을 굳이 아까운 먹을 갈아가며 기록으로 남겼을까 싶다. 파리는 쫓아낼 수는 없지만 벼룩은 쫓아낼 수 없다, 가 결론인 건가? 이익은 벼룩 퇴치 법을 몰랐던 걸까?

 

 

 

이익과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이익보다 마흔 살 정도 연상) 홍만선은 일종의 생활 정보지인 『산림경제(山林經濟)』라는 책에 벼룩퇴치법을 기록해 두었다.

 

 

 

 벼룩 이[蚤虱]를 물리치는 방법은, 창포(菖蒲)ㆍ총(蔥)ㆍ부평(浮萍) 각 1근을 만들어 가루로 매번 반 잔(半盞) 씩을 자리 위에 뿌리면, 다음 날에는 저절로 죽는다. 《고사촬요》ㆍ《신은지》에 “개벼룩[狗蚤]을 퇴치(退治)한다.” 하였다. (산림경제(山林經濟) > 산림경제 제3권 > 벽충(辟蟲), 출처: 고전번역원) 

 

 

 

이익이 산림경제를 봤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다방면에 관심이 많고 식견이 풍부하던 이익이 당시에 널리 알려진 벼룩 퇴치법을 몰랐을 리는 없다. 그보다 이런 해석은 어떨까.

 

 

 

파리는 낮에 활동한다. 해가 된다 하더라도 인간의 의식 또한 ‘맑게 깨어있는 상태’이니 퇴치하는 방법을 연구하여 실행에 옮길 수 있다. 벼룩은 사람이 잠든 ‘밤’에 활동하니 어찌할 수가 없다. 인간의 의식이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파리 퇴치와 벼룩 퇴치는 기술적인 해결책의 유무가 아닌, 인간의 의식의 유무에 따른 차이다. 몽유병 환자가 아닌 이상, 우리는 파리는 쫓을 수 있지만 벼룩은 그럴 수 없다. 

 

 

 

 나의 인생에 파리는 무엇이고 벼룩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인생에 있어 안 되는 일은 안 되는 일이다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것은 요즘과 같은 시대에 인생을 향유하기에는 지나치게 소극적인 자세일지도 모른다. 나는 무엇이 파리였고 무엇이 벼룩이었는지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것일까. 어쩌면 파리를 벼룩으로 벼룩을 파리로 착각하고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