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취업기 - 초보 직장인의 고충
2. 왜 은행생활이 아니고 '취업기' 인가
은행 생활 1년차에 은행을 떠난 사람들이 많았다. 이유는 각양각색. 적성에 안맞아서, 생각보다 봉급이 적어서, 일이 고되서, 다른 더 좋은 잡을 찾아서 등. 그래서 나는 1년차 시기는 여전히 취업기의 연장이라고 생각한다. 나이도 상대적으로 젊고 다른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시기다. 다른 곳도 별거 없을 수 있지만, 그걸 자기 눈으로 확인해야 납득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직장 상사가 거지 같아서, 라는 이유라면 나는 절대 그만두지 않는게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그거야 말로 '직장' 자체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여지가 있다면 상사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해보거나 부서 이동을 신청하거나 인사부와 상담을 하는 등 다양한 해결책이 있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다른 직장에서도 '거지같은 상사'는 존재한다.
그 거지같은 직장 상사가 기업 '문화'의 일부라면 좀 다르다. 그건 그 조직 어디를 가던 똑같은 상황이라는 이야기니까 그런 경우라면 탈출을 권한다. 조직을 너무나 사랑해서 한 몸 바쳐 조직 문화의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원대한 야망을 품은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당연히 나의 직장 상사도 거지 같았다. 일은 서툴렀고, 가르쳐 주는 능력도 없었고, 인간적이지도 않았다. 거의 모든 의미에서 별로였다. 그리고 그런 직장 상사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게다가 하는 일도 고되었다. 아마 당시의 나에게는 은행을 그만 둘 이유가 차고 넘쳤던 것이다. 그래서 걸핏하면 반항하고 조직의 권위에 도전했다. 나는 골칫거리였다.
그러는 사이, 하나둘 함께 입사한 사람들이 은행을 떠났다. 개중에는 자신과 함께 일하지 않겠냐고 일자리를 제안한 사람도 있었다. 나는 확신이 없었다. 그 일자리가 지금보다 나은 일자리인지. 어쩌면 나라는 인간 자체가 조직 생활을 하기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샌다고, 대학 시절 내내 거의 은둔자처럼 살았던 나의 사회적 관계 맺기 능력이 부족한 것이 문제의 원인이라면, 내가 속한 조직을 바꾼다고 해결될 것 같진 않았다.
나는 남았다. 사실 남았다는 표현보다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기로 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일단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또 새로운 환경에 노출을 하느니 있어보자, 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리 많이 나아지진 않았다. 십수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내가 조직 생활에 맞는 사람인지 확신이 없다. 그것은 나에게 괴로운 상황이다. 많은 사람들과 적당히 거리감을 유지하며 사회적으로 용인된 무언가를 주고 받는 행위 말이다. 나는 아주 가까운 몇 사람과만 커뮤니케이션을 하거나 혹은 아예 익명으로 남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내가 은행에 남을 수 있었던 사실로 비추어보건대, 은행은 다른 직장에 비해 과도한 조직 생활 중심의 문화는 아닌 것 같다. 적어도 내가 다니는 곳은 그런 것 같다. 영업점은 기본적으로 클라이언트 중심이다. 업무 시간 중에 동료들과 커뮤니케이션 할 일이 단편적이다. 승인 해주세요, 금고에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같이. 4시에 영업종료를 하고 나면, 각자의 하루 마감을 우선적으로 하고 한 6시쯤 그 작업이 끝나면 내일의 업무를 위한 준비 같은 것을 한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때는 기본적으로 야근을 했다. 하루 동안 일어난 업무의 마무리를 하는 데만도 꽤 시간이 걸린다.
클라이언트 업무 - 업무 마무리 - 내일 업무 준비
9 -16 16- 18 18- ?
하루의 업무량 비율이 대략 저 정도다. 그러니 조직 생활이라고는 하지만, 하루 종일 사뭇무실에 붙어 있으면서 서로 커커뮤니케이션 해야 하는 상황과는 많이 다르다. 자 업무시작, 흩어져! 자 업무 종료 헤쳐 모여! 같은 패턴이다.
어쩌면 은행마다 문화가 다르므로 일반적이지 않은 사례일 수도 있다. 그래도 생각보다 많은 회사들이 사무실에서 "하루 종일" 서로만 쳐다보며 일하는 환경이다. 각자의 업무가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 상황이라면 좀 낫겠지만, 팀웤으로 해야 한다면, 가족보다 오래 관계를 맺어야 하는 사람들인 셈이다. 그 중에 상대하기 껄끄러운 사람이 있거나 한다면 최악이 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은행의 조직생활은 포지셔닝이 좀 애매한 셈이다. 개인적인 업무 + 조직적인 업무가 적당히 믹스되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은행에서는 조직 충성을 하건 안 하건 생활하는 데 큰 차이가 없다. 뭐 승진이나 그런 쪽으로는 당연히 영향이 있겠지만, 서로 간에 눈치를 준다거나 그런 문화는 없다. 그런 건 '개인의 자유' 정도로 간주된다. 충성하고 싶으면 충성해서 승진해라, 나는 주어진 업무를 실수 없이 처리하는 데 집중하겠다, 고 해도 그것으로 충분하다.
은행이라는 조직 자체가 공무원적인 구석이 있다. 이윤을 내는 영리 기관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금융 안정 등의 공적 역할도 어느 정도 맡고 있어서,
우수한 실적에 대한 포상 < 실수 없는 일 처리
같은 부등식이 성립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카드 실적이 우수해도 금융실명법을 위반했으면 아웃이다.
이런 부분도 나의 성향에 어느 정도 맞았다.
하지만 그래도 조직 생활 자체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있었고, 실적 압박도 괴로웠고, 상사, 동료와의 갈등도 나를 힘들게 했다. 가끔 나는 당시 내가 졸업 전에 취업에 성공하는 대신, 대학원을 가든지 했으면 어떨까 생각한다. 백퍼센트 확률도 잘 안됐을 것이다. 왜냐면 대학원에도 인간 관계가 존재하고 정치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좁은 네트워크 속에서의 생활이라 더 치열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내게 남은 선택지는 결국 "자영업"일텐데, 요즘 내가 실험 중인 부분이다.
회사를 다니면서 어느 정도의 패시브 인컴을 확보할 수 있는가. 그러고 보니, 지금도 취업기의 연장 같네.